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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셀로나 회장 선거의 복잡한 정치적 관계 - 라포르타는 어떻게 승리할 수 있었는가?

스테이플우드 2021. 3. 14. 12:58

By Dermot Corrigan Mar 8, 2021/원문보기(디 애슬레틱)

 

"주안 라포르타가 2010년 바르셀로나를 떠났을 때, 우리들 중 몇몇은 그가 언젠가 회장으로 다시 돌아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바르셀로나가 충격, 엄청난 쇼킹 상태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라고 카탈루냐의 베테랑 축구 작가 프레데릭 포르타가 말한다. "그리고 이것이 지금 상황입니다. 이것이 그가 돌아오는 이유입니다."

 

"카탈루냐에는 이러한 문구가 있습니다. — '현명한 이방인보다 우리가 아는 미치광이가 더 낫다'. 가장 중대한 위기의 순간에 사람들은 카리스마있고 신의 뜻을 가진 리더를 찾습니다. 라포르타 유권자는 그의 성명서나 그의 팀 디렉터들에게 투표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기적을 찾고 있습니다. 처음으로, 그는 작은 기적을 이뤄냈습니다... 이제 그들은 더 큰 기적을 바라고 있습니다."

 

2003년부터 2010년까지 바르샤 회장으로 취임한 라포르타의 첫 재임 이후 실정은 클럽을 충격에 빠뜨렸는데, 지난 여름 바이에른 뮌헨에게 8-2 대패를 했으며, 이는 챔피언스 리그 탈락에 있어서 당혹스럽고 굴욕적인 완패의 절정이었다. 

 

이어 지난 10월 주제프 마리아 바르토메우의 회장직에서 사임한 이후 구단의 재정적 입지가 명확해졌다. 

 

수년간의 부실경영은 클럽에 11억 7천만 유로(약 1조 5,850억)의 부채의 누적을 안겨다 주었다. 이는 정상적인 사업으로 따져 보자면 파산과 청산을 의미한다. 지난 주 바르토메우를 비롯하여 과거 또는 현재 바르셀로나 임원으로 있는 3명이 누 캄프에서 잠재적인 금융 범죄에 대한 사법 조사에 체포된 것은 클럽이 얼마나 엉망진창인지 다시 한 번 상기시켜 주었다. 

 

이 기적의 희망은 선거에서 기록적인 "소시오스"(팬 멤버들)의 투표율을 촉발시켰다. 카탈루냐에 위치한 2만명 이상의 소시오스파들이 일찍이 우편 투표로 투표를 한 후, 어제 거의 3만 5천여명이상이 누 캄프에 나타났고 5개의 투표소에서 총 55,611명의 유권자가 나왔다. 약 3만명 이상이 라포르타에게 투표하여 54%의 투표율을 기록했고, 빅토르 폰트의 40%와 토니 프레시아의 9%를 앞섰다. 이 압도적인 승리로 라포르타는 70년만에 처음으로 바르셀로나 회장직에 복귀하게 되었다. 

 

일요일에 직접 경기장으로 나와서 투표를 해야한다고 느낀 선수들 중에는 바르셀로나의 주장 리오넬 메시와 팀의 카탈루냐 선수 세르히오 부스케츠, 세르지 로베르토, 조르디 알바 그리고 리키 푸이그 등이 있었다. 보얀, 루이스 엔리케, 카를레스 푸욜, 에릭 아비달, 후안 카를로스 운수에들 뿐만 아니라 전 클럽 회장인 엔릭 레이나와 후안 가스파르트를 포함하여 전 선수와 감독들 또한 있었다. 

 

이 상황의 심각성은 바르셀로나의 인물들 중 어느 누구에게도, 혹은 지난 12개월 동안 누 캄프에서 벌어진 사건들을 면밀히 살펴온 사람들에게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클럽 역사상 가장 비견될만한 과거의 순간은 아마도 2003년 라포르타가 회장으로서 첫 임기를 시작해였을 때일 것이다. 당시 바르샤 역시 경기장 안팎에서 위기에 처해있었다. 대단히 인기가 없었던 회장이 시즌 중반에 사임을 했고, 팀은 이전 해에 다른 감독들 밑에서 어려움을 겪었고, 구단의 재정 상태는 엉망이었으며, 상황을 변화 시키기 위해서 새로운 아이디어들과 에너지가 요구되었다. 이 말이 친숙하게 들리는가?


"이 캠페인은 마법이었죠, 아주 마법같았죠." 클라우디아 비베스 피에로가 회상했다. "우리는 매우 어렸고, 저는 심지어 순진했다고 말할 수 있어요. 저는 33살이었고, 세 명의 어린 아이들이 있었습니다. 바르샤는 저의 모든 것이었고, 모든 것들이 정화된 것을 봤어요. 일단 클럽에 들어오면, 모든것들이 그렇게 순진한게 아니라는 것을 알게 돼죠. 하지만 그 캠페인은 마법과도 같았습니다. 그들은 우리에게 우승할 가능성을 전혀 주지는 않았지만, 이것은 파도, 쓰나미와 같았어요. 우리는 지지를 쌓았고, 전염성이 있는 에너지가 있었고, 모든 사람들이 매우 열정적이었습니다. 자신감이 가득찬 새로운 빗자루였죠."

 

비베스 피에로는 평생 바르샤 팬으로 아버지가 클럽의 재단에 관여했었다. 바르토메우의 전처와의 우정을 통해서, 그녀는 산드로 로셀, 그리고 라포르타와 만났다. 비베스 피에로의 남편은 마르크 잉글라로 FC 바르셀로나를 쇄신하고자 했던 젊고 야심찬 카탈루냐인 유력인사로 이 운동에 참여했었다. 

 

이 무렵, 라포르타는 오랜 기간 회장이었던 조셉 루이스 누네즈의 클럽 장악에 도전한 "엘레펀트 블라우"(푸른 코끼리) 플랫폼의 세바스티아 로카와 공동 리더로 이름을 날리며 바르샤 서클에 이미 잘 알려져 있었다. 1997년, 엘레펀트 블라우는 누네즈에 대한 불신임 운동을 성공적으로 가져왔으며, 비록 누네즈를 즉시 몰아내는데는 성공하지 못했지만, 3년 후에 오랜 기간 재직했던 바르샤 회장은 그의 전 부회장 가스파르트로 교체가 되면서 물러났다. 

 

가스파르트의 클럽을 맡은 후 클럽 상태가 점점 나빠지면서 항의 운동이 계속되었다. 또 다른 사람들 "개혁운동가"들이 라포르타의 팀에 합류했다. 페란 소리아노, 조르디 모익스, 그리고 에바리스트 무트라 등이 포함되었고, 빅토르 폰트라고 불리는 훨씬 젊은 금융 전문가도 참여하였다. 

 

"세기가 막 바뀔 무렵이었고, 라포르타는 새로운 세대의 등장을 상징했죠." 클럽의 역사가이자 유럽의 왕이라는 책을 저술한 바르샤의 작가인 앙헬 이투리아가가 말했다.

 

"1950년대부터 바르샤의 회장들은 모두 사업가였는데 나이가 많고 매우 보수적이라서 클럽을 현대화하지 않았어요. 라포르타는 신선한 공기를 내뿜는 존재였는데, 무슨 말을 해야할지 항상 알고있는 성공한 변호사였고 사람들을 어떻게 데려와야 하는지 알고 있었죠. 그가 리더가 되는게 이치에 맞았어요. 다른 사람들은 로셀과 소리아노처럼 뛰어난 전문가들 이었지만 라포르타가 '바르샤의 존F 케네디'로 알려지게 만든 카리스마는 없었어요."

 

라포르타가 바르샤의 회장으로 돌아왔다.

라포르타와 그의 팀이 2003년 가스파르트의 사임 이후 치러진 선거에서 승리할 것이라는 것은 아직 명확하지 않았다. 루이스 바사트(나중에 TV쇼 The Apprentic의 스페인어 버젼을 이끌게 됨)는 그의 단장이 되기로 동의한 펩 과르디올라를 포함하여 많은 중요한 클럽 인물들의 지지로 선호하는 사람으로 나서게 되었다. 바사트가 선거 기간에 입지가 흔들렸고 라포르타가 51%의 득표율로 그를 추월하여 과르디올라는 결국 카타르에 있는 알 알리로 선수생활을 계속 이어나가게 되었다. 

 

이투리아가는 라포르타와 그의 팀이 빠르게 일을 진행했고 클럽을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완전히 현대화시키기 위해서 잘 준비된 계획을 실행에 옮겼다고 말한다. 전 바르샤 선수이자 감독이었던 요한 크루이프는 이전 정권하에서 클럽에서 완전히 따돌림을 당했지만, 이제 회장이 가장 신뢰하는 조언자로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다. 

 

이투리아가는 "그들은 클럽을 완전히 개조할 수 있는 사회적, 재정적, 그리고 스포츠 차원에서 세 개의 강력한 기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라고 말했다. "로셀이 스포츠 팀을 담당했지만 크루이프는 자신이 원하는 코치를 선임하고 팀을 자신의 아이디어로 되돌려 놓을 수 있었습니다. 재정적인 측면에서는, 페란 소리아노와 마크 잉글라가 클럽 운영 방식을 완전히 뒤집어 놓았죠. 1950년대 까지만 해도 여전히 구식 덩어리였죠."

 

로셀은 2002년 FIFA 월드컵 우승팀인 브라질의 필 스콜라리 코치를 임명하고 싶었지만, 라포르타는 크루이프가 선택한 프랭크 레이카르트를 영입했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데이비드 베컴과 게약을 하겠다는 선거 공약은 금방 잊혀졌고 대신에, 로셀은 파리 생제르망의 호나우지뉴와 계약하기 위해서 나이키에서 그의 연락처를 이용했다. 

 

"소리아노와 잉글라는 클럽의 수입을 엄청나게 크게 증가시켰고 세계적인 아이콘인 호나오지뉴의 이적이 매우 중요했습니다. 바르샤는 전 세계에서 많은 슈퍼 스타들로 이루어진 팀이 되었습니다."

 

치키 베히리스타인 풋볼 디렉터가 하위권 팀에서 살펴본 선수로는 멕시코의 라파엘 마르케스와 네덜란드의 만능 선수인 지오반니 반 브롱크호르스트가 포함되었다. 더욱 중요한 것은, 홈그로운이 되는 젊은 선수 안드레스 이니에스타와 빅토르 발데스가 시니어 팀에 사비와 푸욜과 함께 합류했다는 것이며, 어린 리오넬 메시 또한 곧 합류할 것이라는 점이었다. 라포르타의 회장으로서의 첫 시즌은 트로피 없이 끝났지만 상황은 분명히 올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었다. 2년차 때는 팀이 6년만에 처음으로 라 리가 타이틀 우승을 차지했다. 

 

"아주 짧은 시간안에, 그들은 큰 성공을 거뒀죠." 이투리아가가 말한다. "페란 소리아노가 '선순환'이라고 불렀습니다. 전략적으로 큰 계약들로 그들은 팀에 성공을 가져다 주게 되었고, 스타 플레이어들은 스폰서, 비즈니스 파트너들에게 클럽이 매력적으로 보이게 도와줬습니다. 이는 클럽이 재정적으로 회복하는데 도움을 주었죠. 그리고 그들은 더 많은 선수들과 계약할 수 있는 돈을 가져다 줬습니다. 선순환. 그리고 첫 몇 년 동안은 아주 잘 굴러갔습니다. 사람들은 '라포르타의 기적'에 대해 말했죠."

 

다음 시즌, 바르샤는 아스날을 2-1로 이기면서 클럽의 두번째 유러피언 컵 우승을 차지했다. 클럽의 성쇠에서 3년만에 일궈낸 놀라운 호전은 이를 달성하게 되었고 라포르타와 그의 디렉터들은 파리에서 파티를 즐길 것이 확실했다. 

 

"축하행사가 가장 성대한 행사였죠." 그날 밤 클럽 디렉터였던 비베스 피에로가 말한다. "우리는 삭막하고 힘든 여정을 거쳐왔는데 이건 정말 잔인하다고 느낄 정도였습니다. 이것은 제 인생에서 가장 날것 그대로의 축하파티였습니다. 거기에는 집단 감정이 너무 컸습니다."

 

그러나 그 파티에서 놓친 것은 바르샤의 상황을 바꾸기 위해서 팀에 들어간 중요한 멤버들이었다. 라포르타의 "라이벌 팀"들 사이의 분위기는 항상 경쟁적이고 때로는 단두대 매치였는데 로셀은 특히 크루이프가 자신의 소관에 있다고 느끼는 결정을 내리는 것에 점점 화가 났다. 그래서 2005년에 로셀은 이사회에서 사임했고, 바르토메우를 포함하여 4명의 다른 디렉터들과 함께 클럽의 농구 부분을 담당하게 되었다.

 

"첫 해는 산드로가 더 많은 통제력을 가지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힘들었습니다." 비베스 피에로가 회상한다. 주안은 페란과 마르크에게 많이 기댔고 스포츠 분야에서 요한 크루이프의 말을 많이 들었다. 산드로는 이에 동의하지 않았고 긴장감이 넘쳐났다. 그는 쿠데타를 일으키려고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는 몇 명의 감독들을 데리고 왔지만 충분하지 않았다. 

 

그러나 비베스 피에로는 라포르타가 로셀에게 개인적인 것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은 단지 클럽을 위한게 뭐가 최선일지에 대한 생각이 다를 뿐이었다.

 

라포르타의 어떤 아이디어들은 다른 것보다 덜 논란이 되었다. 2006년 유니세프와 체결한 셔츠 스폰서쉽 계약은 다른 사람들이 낸 아이디어보다 더 개끗하고 더 도덕적인 클럽이라는 아이디어를 상징하게 되었다. 그러나 우즈베키스탄의 독재정권 트로피팀인 부뇨드코르와의 상업적인 관계는 덜 원칙적으로 보였다. 특히 나중에 라포르타가 자신의 법률 회사인 라포르타 & 아르보스가 우즈벡의 석유 거물, 부뇨드코르 클럽 회장 Miradil Djalalov와 수익성이 좋은 관계를 맺었다고 인정했을 때 더욱 그랬다. 

 

이적 거래 또한 상당한 타격을 입었다. 

 

호나우지뉴는 환상적인 성공을 거두었고, 셀틱에서 FA로 헨릭 라르손을 얻은 것에 영감을 받아서 레알 마드리드의 코앞까지 온 마요르카의 사무엘 에투를 낚아채버렸다. 그러나, 실패작인 브라질 축구 선수 케이히송과 헨리케에게 24.4m 유로를 쓴 것은 덜 성공적이었다. 또한 2005년 누 캄프 근처의 캔 리갈트(Can Rigalt)에 토지 부지 계약이 있었는데, 이는 클럽의 법적 문제를 더 줄이도록 하는 것이었다. 팀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지역 언론(특히 고도 그룹, 일간 스포츠 신문인 문도 데포르티보와 라디오 방송국 RAC1)과 구 보수 정권과 가까운 영향력 있는 소시오스들이 이사회가 저지른 실수를 지적해대는 좋은 기회를 잡게 되었다. 

 

비베스 피에로가 말한다. "로셀이 한 때 외부에서, 라포르타에 대항하여 '기계'를 만들었다는 것은 확실합니다."

 

2006년에서 2009년까지 레알 마드리드 회장이었던 라몬 칼데론이 본지에 밝힌 것처럼, 라포르타는 바르샤의 팬층에서 점점 인기가 사라져갔고, 실제로 클럽의 가장 큰 라이벌인 레알 마드리드에서 더 많은 사랑을 받았다. 

 

"사내에서의 관계는 환상적이었고 클럽들 사이에서는 절대로 어떠한 문제도 없었습니다." 칼데론이 말한다. "정반대로, 감독들 간의 경기전 식사는 항상 친근감이 흘러나왔습니다. 그리고 경기 중이나 임원진 구역에서의 행동에 대해서도 똑같이 말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라이벌 팀을 대표한다는 것을 알았지만 절대로 적은 아니였으며, 항상 서로 존중하고 예의를 보여줬습니다. 우리의 개인적인 관계는 항상 좋았고, 저는 여전히 그를 친구로 여깁니다. 저는 그가 저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거라고 믿습니다."

 

칼데론은 2007-08년 라포르타가 우승을 확정지은 바르샤의 선수들에게 에스타디오 산티아고 베르나베우에 있는 경기장에 가드 오브 아너(우승 축하 박수)를 주겠다고 합의한 것에 기뻐했지만 카탈루냐 수도로 돌아온 후 분위기가 별로 긍정적이지 않다는 것을 알게되었다. 감독으로서 레이카르트의 재임 기간에 또 다시 트로피가 없는 시즌으로 끝나게 되자 불만을 품은 소시오스들에 의해서 불신임 운동이 시작되었다. 불과 2년 전에 챔피언스 리그를 우승했음에도 불구하고 61%의 소시오스들이 불신한다고 투표했고, 이는 이사회가 사퇴해야 하는지 총선거를 실시하는데 필요한 66%에 약간 못미치는 수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리아노, 잉글라, 비베스 피에로를 포함하여 8명의 디렉터들이 사임했다. 

 

과르디올라와 라포르타는 함께 엄청난 성공을 이루어냈다.

과르디올라는 2003년 바사트의 편을 든 것에 대해 용서를 받았다. 그는 베히리스타인에 의해서 2007년 여름에 바르샤B 유스팀을 감독하기 위해서 클럽으로 복귀하였다. 2008년 여름에 레이카르트가 떠났을 때, 몇 명의 디렉터들은 후임 감독 문제에 대해서 다른 생각을 가졌었다. 잉글라는 당시에 실직했던 조제 무리뉴를 지지했고, 게타페 감독인 마이클 라우드럽 또한 고려되었다. 그러나 라포르타는 크루이프와 함께 그들의 본능을 따라가기로 했다.

 

"대부분의 소시오스(60%)들은 라포르타가 구단에서 나가주길 원했지만 그는 게속 앞으로 나아갔으며 크루이프의 충고를 따라 과르디올라와 계약했습니다."고 작가 포르타가 말한다. "이것이 라포르타입니다. 그는 위험을 감수하는 사람이죠. 그는 모 아니면 도로 향해서 결국 이기는것을 즐깁니다. 그리고 그때도 그는 이겼습니다."

 

과르디올라는 역대 모든 구단을 통틀어서 홈에서 배출해낸 선수 중에서 최고의 세대를이 최고점에 도달하게 해냈다. 발데스, 푸욜, 제라드 피케, 사비, 이니에스타, 메시와 함께한 팀은 펩 휘하에서 처음으로 6관왕을 차지하게 되었으며, 여기에는 첫 챔피언스 리그, 라 리가, 코파 델 레이라는 스페인 구단이 처음으로 달성한 트레블이 포함된다. 2010년에 그들은 다시 도메스틱 더블을 달성했지만 무리뉴의 인테르에게 챔피언스리그 4강전에서 탈락당했다. 라포르타는 2006년에 그 누구의 반대도 받지 않고 재선출된 라포르타의 두번째 임기가 끝나갔고, 이전 구단 역사를 통틀은 것 보다 과르디올라의 7년이 더 많은 유러피언 컵 우승을 차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포르타와 "크루이피스타스(Cruyffistas, 크루이프의 독실한 추종자들)"는 유산을 포기할 수 없었다. 대신에, 그의 철천지 원수인 로셀이 그의 뒤를 이어서 회장이 되었다. 그동안에 바르샤를 완전히 바꾸어 놓은 많은 팀원들은 바깥에 남겨졌다. 

 

"결국에는 소시오스들이 힘을 가지게 되겠죠."라고 비베스 피에로가 말한다. "만약 그들이 당신을 원하지 않는다면, 음, 당신은 당신이 원하는 곳으로 가야겠죠."


로셀이 클럽 회장 첫 해에 또 다른 트레블을 이루러 가는 팀을 인계받았고, 라포르타는 정치에 뛰어들었다. 

 

그는 "민주주의의 카탈루냐"라고 불리는 새로운 정당을 세웠다. 이는 2010년 11월 선거에서 독립 연합을 위한 카탈루냐인 결속이라는 운동이다. 라포르타는 지역 의회의 의원으로 선출되었지만, 그의 정당은 전체 투표의 3%만을 얻었다. 

 

"정치의 세계란 축구의 세계보다 훨씬 더 복잡하죠." 포르타가 말했다. "라포르타는 바르샤에서의 모든 성공을 이루었으니 정치에 입문하게 되면 카탈루냐 지역의 총리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을 겁니다. 하지만 정치의 세계는 약속, 협정, 거래들과 관련이 있죠. 이것은 훨씬 더 복잡한 것이고 더 어려운 세계입니다. 그래서 그는  빠르게 정치계에서 탈출하기 시작했죠."

 

한편, 바르셀로나로 돌아온 로셀은 라포르타가 회장직에 있는 동안에 실행되었던 라포르타 팀의 "혁명"을 무효로 되돌리려고 했다. 과르디올라는 새로운 회장 밑에서 불편했고 감독으로서 겨우 두 시즌을 버텼다. 그리고 크루이프는 완전히 소외되었다. 

 

바르샤의 새 정권은 라포르타가 남기고 간 재정적 상황에 대해서 특히 부적절하다고 주장했다. 인수한지 몇 주 만에, 그들은 선수들의 임금을 지불하기 위해서 1억 5천만 유로를 대출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이전 이사회에 대해서 법적 조치를 취하기까지 하면서 그들이 재임했던 시기에 누적된 손실 47.6m 유로를 상환하라고 요구했다. 로셀은 법정에서 자신이 회장으로 취임했을 때 "기술적으로 파산한 상태"라고 말했다. 바르토메우와 프레시아는 또한 라포르타와 그 일당들이 클럽에 있는 동안에 재정적인 결정의 책임에 있어서 개인의 잘못도 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 법적 소송은 카탈루냐 법 체계에서 성공적이지 못했다. 

 

외부인이 보기에는 라포르타는 항상 정치공작을 벌이고, 계략을 꾸미고, 음모에 둘러싸인 것처럼 보였다. 나중에 클럽의 돈이 2008년에 그를 반대하는 비난 운동의 리더들을 염탐하는데 사용되었다는 것이 밝혀졌다. 하지만, 비베스 피에로는 자신의 경험상, 이것은 라포르타가 살고 싶어했던 세상이 아니며, 그가 보통 사람들을 대하는 방식을 대표하는 것도 아니라고 말한다. 

 

"주안은 그런 종류의 분위기를 즐기지 않았어요." 비베스 피에로가 말한다. "그는 기만적인 사람이 아니라, 굉장히 올곧은 사람이며 정면에 부딪히는 사람입니다. 당신은 그가 오고있는걸 볼 수 있죠, 그는 당신을 속이려고 들지 않아요."

 

실제 정치에 입문하고 나서 환멸을 느낀 라포르타는 축구, 바르샤로 돌아오기로 결심했다. 이미 로셀은 지난 여름 네이마르 이적에 대한 조사 과정에서 이미 사임을 한 상태이기에, 주된 경쟁자는 바르토메우가 되었다. 소식통들은 라포르타가 2003년에 바르샤에 들어갔을 때도 바르토메우를 진지하게 받아들인 적이 없다고 본지에 말한 바 있다. 

 

라포르타는 2015년 바르샤 회장으로 복귀하기 위해서 그의 새로운 단장으로 에릭 아비달과 함께 캠페인을 시작했다. 유벤투스 미드필더 폴 포그바는 미노 라이올라와의 지속적인 훌륭한 관계로 인하여 여름에 큰 계약건으로 서게 되었다. 그는 또한 회장으로서 자신의 임기의 핵심이었던 "mes que un club(클럽 그 이상의)" 아이디어를 계속 추진했다. "우리는 유니세프이며 로셀과 바르토메우는 카타르입니다."라고 라포르타가 선거유세기간 동안 말했고, 이는 그가 클럽을 떠난지 5년만에 바르샤가 어떻게 변했는지를 지적한 것이다. 

 

하지만 메시, 네이마르, 루이스 수아레즈가 루이스 엔리케의 팀을 또 다른 라 리가, 코파 델 레이, 챔피언스 리그 트레블을 막 이루어내어 바르토메우의 캠페인 슬로건 "트레블 그리고 트레블"이 확실한 승자가 되었기 때문에 이런 일은 절대로 통하지 않았다. 그는 47,270표 중에서 54%를 득표했고, 라포르타는 33%로 2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우리가 진다는게 확실해졌을 때, 라포르타는 제가 항상 기억했던 것을 말했습니다." 그 해 라포르타의 선거운동에 참여했던 마르크 시리아가 말했다. "우리 모두 매우 우울했습니다. 그는 '나는 내가 졌다는거에 화나지 않아, 이건 바르샤가 진거야.'라고 말했습니다. 시간은 우리가 옳았다는 것을 보여줬습니다."

 

클럽의 역사가 이투리아가는 라포르타와 주변 사람들이 2015년 선거에서 이길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것을 알았지만, 로셀과 바르토메우에 대한 반항심을 보이고 싶어했다고 말한다. 그의 마음속에는 앞으로 어떻게 구단이 운영될 수 있을지에 대한 대안은 여전히 남아있었다. 

 

"그들은 바르토메우가 이길거라는걸 알고 있었습니다. 소시오스의 90%가 팀이 잘 굴러간 것을 근거로 두어서 투표했지만 여전히 반대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라포르타를 잊지 않은 15,000명의 소시오스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되어 기뻐했습니다. 그 때문에 다시 돌아오겠다는 생각이 사라지지 않았나봅니다."


또 5년 후에는 경기장 안팎으로 위기가 겹쳐서 메시가 클럽을 나가야한다는 강압적인 분위기가 있었고, 지난 여름 바르샤 이사회에 대한 불신임 운동으로 직결되어서 지난해 10월 바르토메우와 그의 디렉터들이 사임했다. 

 

라포르타는 바르토메우를 무너뜨리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인 분노한 유명인사들 중 한 명은 아니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이름을 앞세워서 잠재적인 후보자로 앞서나가려는 사람도 아니었다. 비베스 피에로는 그가 회장 선거에 다시 출마하고 싶은지조차 확신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리오넬 메시가 회장 선거를 하러 왔다.

"그가 정말로 회장이 되기를 원했다기 보다는 사람들이 라포르타를 찾았던게 더 컸습니다. 이건 제 생각이긴 하지만요. 그는 자신이 가진 경험으로 그가 클럽에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가 이기길 바랬습니다. 과거에 잘 일궈낸 일들이 지금의 바르샤를 만들어냈습니다."

 

선거는 처음에 1월 중순으로 잡혔으나, 코로나 바이러스 팬데믹으로 인하여 3월 초로 연기되었다.

 

12명 이상의 예비 후보들이 공개적으로 출마를 고려했고, 9명의 공식 예비 후보들이 최종적으로 라포르타, 폰트, 프레시아 3명으로 줄어들었다.  

 

프레시아는 항상 외부 사람이었고, 넓게 보자면 바르토메우와 로셀과 연관되어 있었으며, 2003년에 구단에서 사임하고 나서 2010년에 이사회 대변인으로 그들과 함께 돌아왔다. 2015년 회장직에 출마하기 위해서 사임을 하고, 선거운동 기간 동안에 옛 동료들과 거리를 두려고 했지만 납득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프레시아는 바르토메우와 로셀 라인에 있는 인물이라는데에 100% 확신합니다." 비베스 피에로가 말했다. 

 

이전 이사회가 경기장 안팎에서 엉망으로 만들었다는 것은 분명했고 바르샤 가문의 "설립 쪽" 출신의 유력 후보가 나서지 않았다. 이 때문에 라포르타와 폰트 사이의 두 명의 경쟁 구도가 벌어지게 되었는데, 폰트는 2003년 라포르타의 선거운동의 일원으로 일했었고 크루이피스타 전통에도 확고히 들어섰다. 

 

"진정으로 '지속성'이 있는 후보는 없었습니다."라고 지난 여름 바르토메우에 대한 불신임 운동에 중심적인 역할을 했었던 마르크 뒤크가 말한다. "프레시아는 가장 가까운 인물이었지만 (이전 이사회)도 그를 믿지 않았습니다. 이 전투는 실제로 크루이피시모의 두 개의 변종들 사이에서 벌어졌는데, 두 후보는 생각의 90%가 일치했습니다. 그들은 클럽에 대해서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데 단지 이것을 어떻게 해 나가야해고 누가 맡아야 하는지가 달랐습니다. 두 요소 모두 바르셀로니시모(바르샤주의-바르샤가 절대적이라는 팬의 믿음)의 낭만적인 전통에 맞으며 크루이프 시대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가을 동안에는 폰트가 좀 더 위치가 좋은 것 같았다. 금융기술 사업가는 지난 여름 공개적으로 바르토메우에 대한 불신임 운동을 지지했고, 사비와 조르디 크루이프, 요한의 아들, 키프러스, 이스라엘, 에콰도르, 중국에서 단장과 코치 경력을 가진 전 바르셀로나의 선수들에게 지지를 받는다고 자주 말했었다. 

 

라포르타의 선거운동은 처음에는 그런 움직임이 없었던 것 같았다. 

 

바르토메우에 대한 불신임 운동에 동참하지 않기로 한 그의 결정은 그가 이전에 어떻게 자신을 맞닥뜨렸는지 상시켰기 때문일 것이다. 퇴임 이사진들에 대한 그의 발언은 그들의 과거 이력을 고려할 때 눈에 띄게 자제되었다. 그는 또한 클럽의 손실을 만회하기 위해서 바르토메우와 다른 디렉터들을 상대로 법저 조치를 취하는 로셀의 예를 다르는 것을 반대한다고 거듭 말했다. 그 아이디어는 2021년 라포르타를 분열된 인물이 아니라 성숙하고 좀 더 정치인으로 보이겠금 계획하는 것 같았다. 

 

이번 선거운동에서 가장 중요했던 순간은 12월 중순에 레알 마드리드 산티아고 베르나베우 바로 맞은편 재건축 중인 다층 아파트에 "당신을 다시 보기를 기대합니다."라는 슬로건이 적힌 라포르타의 얼굴이 들어간 1000㎡ 규모의 배너가 걸렸을 때였다. 이것은 라포르타의 정치적인 기술과 대담함으로 모두의 관심을 끌게 되었다. 

 

한편, 폰트는 사비가 카타르 구단 알 사드에서 공개적으로 헌신하는 모습을 보이자 과거 바르샤 영웅들에 대한 의존도가 흔들렸고, 선전 FC의 조르디 크루이프 헤드 코치는 스페인 라디오에서 "아버지는 언제나 라포르타에게 투표했을 거라고 확신합니다."고 말했다. 

 

라포르타는 소년이었던 호나우지뉴, 과르디올라, 메시와의 관계 뿐만 아니라 회장으로서 자신의 임기동안 보냈던 두번의 챔피언스 리그 경기를 정기적으로 떠올리게 하면서 선거운동의 전반적인 스토리라인을 통제할 수 있었다. 우즈베키스탄, 케이리슨, 캔 리갈트 또는 자신의 불신임 운동에 대한 이야기는 훨씬 적었다. 폰트는 라포르타의 이사진들이 회장으로서 첫 임기를 보냈을 때 동료 디렉터들을 염탐하기 위해서 클럽 자금을 어떻게 사용했는지 상기시키자, 라포르타는 선거운동을 완전히 뒤집어버리는 말로 맞대응했다. "당신이 파워포인트를 작성하는 동안에, 우리는 챔피언스 리그를 우승하고 있었습니다."

 

"이 선거운동은 라포르타에게 꽤 편안했습니다."라고 폰트 선거운동 팀에서 지난 몇 달 동안 일했던 뒤크가 말한다. "그는 과거의 악마들과 대면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빅토르 (폰트)는 아주 깔끔했습니다. 그는 라포르타가 회장으로서 한 나쁜 일들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는 것 보다는 미래를 위한 프로젝트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을 더 좋아했습니다. 그는 분명히 나쁜 짓을 했지만, 다른 일은 잘했습니다. 우리는 되돌아보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나가길 원했습니다. 결국 이것은 라포르타가 11년 전에 한 일들을 설명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우리 모두 이 단게에서 앞으로 나가야만 했습니다."

 

지난 몇 주 동안 토론에서의 폰트의 또 다른 공격 작업은 2003년에 라포르타가 카탈루냐 재계에서 가장 빛나고 가장 최고였던 일부 사람들에게 어떻게 둘러 쌓이게 되었느냐였다. 그러나 당시 그의 귀중한 동료들은 이제 더 이상 그와 함께하지 않았다. 로셀은 현재 적이고, 소리아노는 맨체스터 시티의 과르디올라와 베기리스테인과 함께 있으며 잉글라는 2017년부터 2020년까지 리그1 클럽 릴의 최고 경영자였다. 크루이프는 2016년 3월 암으로 사망했다. (역주- 소리아노(맨시티 CEO), 베기리스테인(맨시티 단장))

 

누 캄프에서 빅토르 폰트, 토니 프레시아, 주안 라포르테

2010년 라포르타가 바르샤를 떠날 때까지, 그는 원래 13명의 강력한 이사진들과 4명의 디렉터만을 남겨놓았다. 이들 중에서 알폰소 카스트로, 조셉 쿠벨스, 알폰스 구달은 2008년에 새롭게 합류한 소수의 여성 디렉터인 마리아 엘레나 폰트와 클럽의 새로운 부회장인 라파엘 유스테를 포함하여 다른 디렉터들과 함께 다시 클럽으로 복귀하고 있다.

 

"2003년, 라포르타는 최고의 전문가 팀을 선보였습니다. 그들은 바르샤에서, 나중에 다른 세계의 지역에서도 엄청난 일을 해냈습니다."라고 뒤크가 말한다. "지금 들어오는 디렉터들은 2003년에 클럽을 다시 부활시킨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 사람들 중에서 어느 누구도 남아있지 않습니다."

 

"폰트의 선거운동은 여러면에서 2003년의 라포르타의 팀과 더 유사합니다. 이것은 스페인에서 가장 성공한 인터넷 스타트업인 프리발리아, 글로보, 트로비트의 설립자들을 포함하여 더 젊은 성공한 사업가들이 가득하죠. 바르샤 소시오스는 이것이 왜 좋은 생각인지 알 수 있었고 바르샤가 새로운 기술과 비즈니스 모델을 받아들일 필요성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폰트의 문제는 자신의 중요한 경쟁자들에 비해서 리더쉽과 개인적인 매력이 부족하다는 겁니다."


그래서 라포르타는 2003년에 처음 회장으로 취임했을 때보다 훨씬 더 어려운 상황에 접어들었지만, 그의 첫 임기를 성공적으로 이끌었던 그의 주변의 목소리와 개성이 없었다. 

현재의 모든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베르나베우에서 생활하는 동안 많은 내외부의 적들과 맞닥뜨렸던 전 마드리드 회장 칼데론은 왜 라포르타가 그렇게도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직장에서 또 다른 기회를 얻기를 원하는지 이해한다. 

 

"라포르타가 다시 회장이 되고 싶어한다는 사실에 전혀 놀라지 않았습니다." 칼데론이 말했다. "저는 그가 이 일을 정말 좋아하고 도전을 좋아한느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는 이제 매우 큰 어려움에 직면하겠지만, 저는 그가 성공할거라고 확신합니다. 라포르타의 승리는 바르샤 팬들에게 매우 좋은 소식입니다. 그는 클럽을 이끄는데 뛰어난 능력을 보여주었고 어려운 순간에도 뛰어난 재능과 강한 대처로 반응했습니다."

 

라포르타를 아는 사람들은 58세의 나이에 그렇게 많은 전투를 겪은 그가 지금 그의 임무를 직면할 수 있는 똑같은 에너지를 가지고 있는지 궁금해졌다. 일요일 밤 당선 소감에서 그는 크루이프를 떠올리면서 모두에게 팬데믹의 어려움에 대해서 언급했지만,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이 가득 차 있다고 시인하면서 모두를 하나로 모으려고 애쓰는 어조를 내비쳤다. 

 

"우리는 대가족이며 이러한 단계를 함께 갈 것이며, 이는 커다란 어려움에 직면하게 될 것이지만 낙관적입니다." 라포르타가 말했다. "바르샤는 다시 자급 자족할 수 있게 될 것이며, 기쁨은 돌아올것입니다. 우리는 부정과 비관론에서 벗어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도전에 응할 것입니다. 우리는 긍정적이고 겸손하며 관대하고 용감해질 것입니다."

 

구단의 재정 상황을 고려할 때, 거물급 슈퍼스타의 이적 타겟에는 전혀 아무런 말이 없었다. 호나우지뉴도 안되고 포그바도 안된다. 

 

프레시아는 킬리안 음바페나 엘링 홀란드와 계약하는 것이 가능할 수도 있다고 말함으로써 그의 약화된 선거운동을 활성화 시키려고 했다. 언제나 논리적인 폰트는 그것이 얼마나 무책임한 것인지 지적하는 것으로 반응했고 페드리나 안수 파티와 같은 어린 보석들을 지키는 것이 더 중요할 것이라고 말했다. 

 

라포르타는 조용히 있으면서 그의 향후 이적 계획에 대한 가능한 적은 세부사항만을 제공하는 것을 선호했다. 

 

하지만, 그는 클럽 밖에서 지내는 동안 계속해서 유명 에이전트들과의 관계를 발전시켜 왔다. 유럽 최고의 거래해결사 중 한 명이 최근 본지에 "라포르타는 축구에서 가장 친한 친구 중 한 명"이라고 말했고, 다음 해 여름 바이에른 뮌헨의 다비드 알라바에 대한 즉각적인 루머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포르타의 복귀에 대한 메세지는 지난 1년 동안 누 캄프에 있었던 모든 사건들과 일치한다.

 

내년 여름 이적시장에서 무엇을 기대하냐는 질문에 뒤크는 "음바페와 계약하지 않을 것"이라며 웃었다. "대단히 새로운 슈퍼스타들이 등장하지 않을 것이며, 우리는 라 마시아의 선수들을 활용해야하고 2-3명의 '영리한' 계약을 해야 합니다. 2003년에 호나우지뉴가 도착했지만 낮은 인지도와 미래의 잠재성을 가진 3-4명의 선수와 계약도 했었죠. 우리는 이런 일들을 해야합니다."

 

그러나 이적에 대한 결정을 내리기 전에 라포르타와 그의 새로운 재정팀은 클럽의 재정 상황이 얼마나 나쁜지 알아내야 할 것이다. 클럽의 총 부채 11억 7천만 유로는 막대한 단기 부채를 포함하고 있으며, 금융 전문가인 시리아는 최대한 자금을 보충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전 이사진들이 누 캄프 재개발 계획을 위해서 미국 은행 골드만삭스와 재정 협약을 맺은 것도 다시 들여다볼 예정이다. 

 

"가장 먼저 구단의 정확한 현황을 파악하기 위해서 내부 위원회를 발족시키는 것이 될 것"이라고 뒤크가 말했다. "우리 모두 상황이 나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이게 약간 나쁜 것인지 아주 나쁜 것인지를 알아내야 합니다. 몇 주가 걸리겠죠. 또한 우리는 은행의 채권자들과 앉아서 매우 취약한 재정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서 부채를 상환하려고 노력해야합니다. 만약 우리가 장기간에 걸쳐서 빚을 갚을 수 있다면, 오늘의 현실을 바탕으로 해서 선수단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라포르타는 선거운동 기간 여분의 현금을 찾기 위해서 채권 시장을 두드리는 것에 대해 얘기했다. 구단의 신임 경제 부회장인 자우메 지로는 두 가지 부채 문제를 언급했는데, 하나는 팬들을 겨냥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투자자를 겨냥한 것이었다. 

 

소속구단의 미래가 걱정되는 팬들은 현재 구단이 직면하고 있는 "현금흐름 긴장을 돕기 위한 협력"에 관심을 가질 수도 있다. 기관 투자가들은 그 대가로 보다 가시적인 것을 요구할 가능성이 높다. 이로 인하여 폰트(그리고 다른 사람들)는 이것이 바르샤의 민주적 소유 모델을 위험에 빠뜨릴 수도 있다고 주장하게 되었으며, 라포르타는 일요일 밤에 즉시 이를 철회하길 바랬다. 그는 "바르샤는 소시오스들의 소유물로 남을 것"이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다음번 고려해야 할 큰 이슈는 시즌이 끝날때까지 자신의 미래를 결정짓지 않겠다고 말해온 팀의 상징 메시의 미래일 것이다. 

 

라포르타는 이날 당선 소감에서 메시와 그의 아들 티아고를 투표소에서 만난 소감을 밝히면서 20년 전에 바르셀로나 구단 주장이 클럽의 유스 팀에서 데뷔하는 것을 지켜봤다고 회상했다. 그는 또한 아르헨티나인이 바르샤를 사랑한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메시와 그의 아버지와의 어떤 협상에서도 이러한 정서적 연줄이 핵심이 될 것이라고 지적했는데, 구단이 그의 연봉 1억 유로를 초과하는 금액을 계속 지불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전 회장과 메시와의 관계는 소시오스들이 폰트 대신 라포르타를 선택한 큰 이유라고 포르타가 말한다. 그는 라포르타가 그 과정에서 많은 디렉터들과 함께 탈락했지만, 그는 항상 클럽의 가장 중요한 "축구계 사람들"과 가깝게 지냈다고 지적했다.

 

"라포르타의 선수들과의 관계는 이보다 더 좋을 수 없을 겁니다." 포르타가 말한다. "그는 항상 약속을 지키며 그들을 오해한 적이 없습니다. 지난 여름 메시가 자신의 내용증명 우편(burofax)를 선보였을 때, 그는 바르토메우의 모든 거짓말과 약속이 깨진 것에 신물이 났다고 말했습니다. 구단의 상황이 정말 최고로 심각한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메시에게 바르샤에서 계속 뛰도록 설득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주안 라포르타라고 확신합니다."

 

2010년 라포르타와 리오넬 메시

로날드 쿠만의 감독으로서의 미래는 아직 결정되지 않은 상태이며, 이 네덜란드인은 지난 주 새 회장의 계획을 보기를 기대하고 있다고 말했고, 그는 아직 게약 1년이 남았다는 점을 지적했다. 

 

이번 사태의 핵심은 지난 주 소식통들이 언급한 쿠만과 라포르타와 강한 관계를 맺고 있는 조르디 크루이프일 것이다. 이 두 사람 모두 크르이푸 가족 재단의 앰버서더이다.  

 

사비가 2022년 월드컵 전에 카타르와의 관계를 끊을 수도 있는지 혹은 심지어 깨기를 원하는지 여부는 아마도 곧 답할 수 있을 것이다. "바르샤 추종자들의 대부분은 사비가 구단의 차기 감독이 될거라고 믿고 있습니다. 라포르타는 그다지 걱정하지 않습니다. 그는 상황이 어떻게 돌아갈지 두고볼 것입니다."라고 포르타가 말했다.

 

한편, 라포르타의 성격과 역사는 그가 무엇을 하든, 어떤 잘못을 저질러서 덮치길 원하는 비평가와 적이 있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라포르타가 경쟁에서 이겼지만 100일의 유예도 받지 못할 것입니다." 포르타가 말한다. "이 기득권층들은 전쟁을 계속 할 것이고 평화는 없을겁니다. 모든 사람들이 이 클럽을 소유하고 있다고 생각해서 내 방식대로 되어야 합니다. 라포르타와 함께라면, 사람들은 그와 함께 하거나 그에게 반대합니다. 우리는 더 많은 드라마가 있을 거라고 확신합니다."


그래서 라포르타가 들어올 때 했던 답변들 보다 더 많은 질문들이 있다.

 

그의 두번째 회장 취임 후 첫 경기는 수요일 파리 생제르망에서 열리는 챔피언스 리그 마지막 16강전이 될 것이며, 이 경기에서 쿠만의 팀은 지난달 누 캄프의 1차전에서 4-1의 골차를 극복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1차전 경기에 관해서는, 구단이 경기장에서 직면한 심각한 상황을 꽤 정확하게 보여주는 역할을 한다. 

 

라포르타는 일요일 밤에 25년 전에 그가 도착했던 현장으로 다시 돌아왔다며 특색있는 환호를 받으며 당선 소감을 마쳤다. "바르샤가 여러분을 위해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묻지 말고 바르샤를 위해서 여러분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물어봐라"며 그가 말했다. 

 

이것이 바로 새로운 바르셀로나 회장이 메시, 쿠만, 사비, 조르디 크루이프, 10만명 이상의 바르샤 소시오들과 전세계의 수억명의 축구팬을 포함하여 구단과 관련된 모든 사람들에게 물어봐야 할 것이다. 

 

구단의 현재 상황에 대한 충격적인 상태로 라포르타는 황야에서 누 캄프로 돌아오게 되었다.

 

이제, 그는 기적을 일궈낼 몇 가지를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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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샤에 대해서 아는게 별로 없다보니 내용이 재밌긴한데 내가 축구 기사를 본건지 뉴욕 타임즈의 정치 기사를 본건지 모르겠다. 근데 펩이 바르샤 선수였을 때 바사트랑 엮인건 처음 알았다. 

본문 내용 중에 Young Truks라는게 나오는데 처음에 젊은 터키인이라고 적었다가 아니 생각해보니까 이 사람들 다 스페인 사람들인데??하고 지우고 찾아보니까 오스만 제국의 개혁 운동에 관한거라고 한다. 그래서 우선 개혁운동가라고 적었는데 더 좋은 표현 있으면 좀 알려주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