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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 그레이엄 포터의 프리미어리그 감독으로의 놀라운 여정 - 1편: 힘들었던 축구 선수 생활

스테이플우드 2021. 2. 15. 21:25

Andy Naylor May 19, 2020

그레이엄 포터는 지난해 8월 마지막 날 자신의 브라이튼&호브 앨비언 팀이 에티하드 스타디움에서 맨체스터 시티와 붙기 전 브라이언 호튼과 나눈 대화를 떠올리고 있다.

"우연히 만났습니다. 저는 말했습니다. '브라이언, 당신 정말 좋아보이는군요.' 그러자 그가 '그래, 그건 내가 더 이상 너처럼 개떡같이 감독하지 않기 때문이지'라고 했습니다."

리그2의 매클즈필드 타운이라는 보통의 환경에서 전 브라이튼과 맨시티의 감독이었던 호튼 휘하 30세의 나이에 선수 생활을 끝낸 "개떡같은"선수는 어떻게 14년 후 프리미어리그의 감독이 되었을까?

포터는 오늘 브라이튼을 맡은지 1년이 되었고 그의 45번째 생일을 젊고 유망한 코치들과 함께 축하를 했다. 아스날의 미켈 아르테타와 첼시의 프랭크 램파드 그리고 본머스의 에디 하우 모두 그들의 소속 구단과 강한 관계를 갖고 있다. 

다니엘 파르케는 2017년에 도르트문트 B팀에서 노리치에 합류하기 전에 전체 커리어를 독일에서 보냈고 노리치를 승격시켰다. 현재 샬케 감독인 데이비드 바그너가 허더즈필드 타운으로 2년더 빠르게 프리미어리그로 간 여정과 같다. 

하지만 포터는 현재 브라이튼에서 2025년까지 계약을 맺었고, 이 계약은 13경기 만에 연장되었다. 중요한 순간들이 브라이튼의 길을 만들어냈고 브라이튼 감독의 축구 철학은 정기적으로 탑10안에 자리잡는 것을 바라고 있다.


버밍엄 소년에게 가해진 야유

그의 고향 클럽의 팬들로부터 10대 시절 야유를 받은 것은 축구의 변덕스러운 성격에 대해 포터가 이르게 교훈을 얻은 것이었다. 그는 프리미어리그가 출범한 1992-93 시즌에 2부리그에 속해있었고 그가 태어난 곳에서 10마일 정도 떨어진 버밍엄 시티의 깊은 곳으로 던져져 준비가 되지 않은 날 것 그대로인 선수였다. 

포터는 디 애슬레틱에 말했다. "힘들었습니다. 약간 불의 세례를 받는 느낌이었습니다. 구단은 강등과 싸우고 있었고, 구단주는 바뀌고 있었습니다. 버밍엄 시티의 역사에서 긍정적인 시기는 아니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17살의 선수가 결국 왼쪽 풀백으로 뛰게 되었습니다."

"당시 감독이었던 테리 쿠퍼는 저를 매우 신뢰했습니다. 아마 제가 너무 많이 뛰었나봅니다."

포터의 커리어 마무리 단계에 대한 호튼의 견해와는 달리, 쿠퍼는 포터가 시작했을 때 유일하게 칭찬한 선수는 아니었다. 그에게는 팀동료인 폴 페시솔리도가 있었고 역시 팬이었다.

그가 디 애슬레틱에 말했다. "제가 캐나다에서 왔을 때, 그는 구단에 들어온 어린 소년이었습니다. 테리는 잉글랜드에서 레프트백으로 뛰고 있었던 그를 윙어로 두었습니다. 정말 재능있는 소년이었습니다.""그는 매우 날씬했고 키가 컸는데 좀 어색한 몸매였습니다. 그렇지만 기술적으로는 훌륭했습니다. 멋진 프로선수였죠. 그는 정말 열심히 뛰었습니다."

이것은 구단을 용서할 수 없는 서포터들의 분노를 피하기에는 충분하지 않았다. "저는 유소년 팀에서 1군 팀으로 갔고 첫 시즌에 30경기 가까이 뛰었습니다." 포터가 덧붙였다. "비록 신체적으로는 어느정도 자질이 있었지만, 저는 불리했습니다. 제가 교체되었을 때 버밍엄 팬들로부터 야유를 받았던 것을 기억합니다. 제가 뉴캐슬전에서 데뷔했을 때 골을 넣었는데 그때 모두가 제가 훌륭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축구에서 결과가 좋지 않을 경우, 당신이 고향 출신 소년인지, 젊은 선수인지, 이런 종류의 것들이 모두 창문 밖으로 튀어나와서 당신에게 팬들의 기분을 알려준다는 것을 금방 알게되었습니다. 상당히 고통스러웠지만 축구 환경이라는게 어떤 것인지 개닫게 해주었습니다."

포터에게는 그의 다음 클럽인 스토크 시티에서도 비슷한 이야기가 있다. 그는 로우 마카리 감독 밑에서 효과적인 역할 변화가 없었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다. 1996년 5월에 1부 리그 승격 플레이오프전에서 그가 헤딩을 놓쳐서 결국 팀이 패배했고 레스터 시티가 승격되었다. 

스토크시티에서 팀 동료였던 페시솔리도는 말했다. "헤딩은 키가 큰 청년이었던 그에게 장점이 아니었습니다. 아마도 이런 이유로 그가 레프트윙으로 계속 뛰게 된 것 같습니다.""그는 저에게 많은 득점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주었습니다. 그는 엄청 빠른 편은 아니었지만 충분히 빠르다고 말할 수 있는 편이었고 기술적으로도 매우 뛰어나서 일찍부터 저에게 크로스를 주곤 했습니다."

포터는 지난 시즌 스완지 시티의 감독을 맡았을 때 유일하게 서포터들에게 훨씬 인기가 많았었다. 그는 스완지를 젊고 활기찬 팀으로 재건하면서 프리미어리그에서 강등과 함께 찾아오는 재정적인 제약 조건에 대처해야했다. 그는 챔피언쉽에서 10위를 했고, 트레블을 이룬 맨체스터 시티의 FA컵 경기에서 엄청난 두려움을 주었다.

지난 여름 상위권 구단인 브라이튼에서 자신을 시험해볼 기회가 왔을 때, 그는 버밍엄 팬들에게 받았던 인상을 지금까지도 가지고 있다고 언급했다. 포터가 말했다. "스완지에서 저와 함께한 서포터들은 놀라울 뿐만 아니라 매우 적었던 나쁜 결과들을 받았고 상황을 다른 방식으로 변화시켰습니다.""축구란 이런겁니다. 17년간 버밍엄 시티에서 뛰었을 때의 경험이 가르쳐주었습니다."


잉글랜드에서 거의 "다른 스포츠"를 뛰는 것까지

포터의 선수 경력은 훨씬 더 화려할 수 있었다.

1996년 여름에 그가 우수한 사우스햄튼으로 합류했을 때 미래는 밝아보였다. 그는 잉글랜드 U-21 국가대표팀에서 뛰었고, 몇 주 후에, 데이비드 베컴이 첫 시니어 대표팀에 합류하였다. 하지만, 4년 안에 그는 리그2의 요크 시티와 계약을 맺었다. 

그는 왜 이렇게 빨리 잘못된 길로 들어서게 된 것일까?

포터는 이 이유에 대해서 두 번의 나쁜 이적과 자신감이 부족했다고 말한다. 스토크에서 3년을 보낸 후, 그는 사우스햄튼에서 쿠퍼와 재회했다. 그의 옛 버밍엄 멘토는 당시에 팀에서 그레임 수네수의 2인자였다. 

포터는 말했다. "테리는 저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레임은 저에 대해서 잘 알지 못했습니다. 제가 먼저 시험을 받고 나서 그가 서명했습니다. 아마도 심리적으로, 저는 프리미어리그로 가는 다음 단계를 밟을 준비가 되어있다는 제 자신에 대한 믿음이 부족했던 것 같습니다."

"저는 단지 사우스햄튼에서 제 길을 찾으려고 했을 뿐입니다. 저는 레프트백과 왼쪽 센터백으로 경기를 뛰었습니다. 미드필드부터 센터백 진영까지 꽤 빠르게 뛰어다녔는데, 아마 제가 길을 좀 잃은 것 같았습니다."

그해 여름 테리 베나블레스 감독 아래 홈구장에서 열린 유로96 준결승에 진출한 잉글랜드는 새로운 감독 글렌 호들과 함께 새로운 시작을 하고 있었다. 베컴은 몰도바에서 열린 월드컵 예선전에서 호들의 첫 경기를 3-0을 장식해 데뷔전을 치렀다. 전날 밤, 포터는 피터 테일러의 U-21 국가대표팀 일원으로서 몰도바 팀을 상대로 2-0 승리를 거두었다.

"우리는 풀전력 팀과 연습 경기를 했습니다. 베컴과 개스코인 등 모든 선수들과 경기를 치른 것은 특이한 순간 중 하나였습니다."

"저는 많은 경기를 뛰지는 못했습니다.(사우스햄튼에서 2차례 교체로 출전하여 34분밖에 뛰지 못했다) 몰도바에서 뛰어보니 예전같지 않다고 느꼈습니다. 우리는 승리했지만 저는 경기를 잘 하지 못했다고 생각했습니다."

포터는 사우스햄튼에서 인상을 남기기위해 어려움을 겪으면서 21세 이하 팀에 다시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저는 뛰지 않았습니다." 그가 말했다. "그때 자신감을 잃었습니다. 21살이었는데, 모든게 잘 풀리다가 갑자기 문제가 생겼습니다. 제가 잘 대처하지 못했습니다."

"돌이켜보면, 스스로를 확립하기 위해서 프리미어리그로 도전하는 것 보다는 스토크에 남아서 더 뛰는게 저에게 더 유익했을 까요?"

"하지만 20대 초반에는 힘듭니다. 문제에 대해서 알고 생각하는 것을 하지 못합니다. 뒤늦게서야 깨닫게돼죠."

사우스햄튼에서 6개월동안 8번을 출전했는데 선발은 단 두번뿐이었다. 포터는 2월에 다시 챔피언쉽 웨스트 브롬위치 알비온으로 돌아갔지만 이 이적 또한 역효과를 낳았다. 감독이 오고 가는 더 호손스(WBA 홈구장)의 격변의 시대였다. 레이 하포드, 데니스 스미스, 브라이언 리틀이 1997년 2월 부터 2000년 3월 게리 메그손의 임명 사이에 감독을 맡았었다. 

포터는 또한 무릎 부상을 입었다. 리그1에 있는 노샘프턴 타운(1997-98)과 레딩(1999)으로 임대된 그는 3년 도안 웨스트 브롬에서 43번밖에 출전하지 못했고, 1999-00 시즌 이후 계약이 만료되어 4부리그 요크에 머물렀다.

"당신이 생각했을 때 처음으로 '와우, 여기는 정말 다른 스포츠구나'라고 여길 수 있습니다. 챔피언쉽에서 나가거나 그 당시에 챔피언쉽에서 자리를 잡는 것은 멋진 경기장에서, 멋진 축구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체스터필드에서 열린 첫 경기를 기억합니다. 이렇게 생각했죠. '나는 여기에 적응해야만 한다.' 돌이켜보면, 아마도 이렇게 말할 수도 있을겁니다. '이것도 하고 저것도 했었으면 좋았을 텐데' 하지만 이건 제 삶의 일부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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