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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 그레이엄 포터의 프리미어리그 감독으로의 놀라운 여정 - 2편: 감독의 길로 들어서다.

스테이플우드 2021. 2. 15. 22:54

Andy Naylor May 19, 2020

결혼 그리고 같은 날 축구와 이혼하다.

2003년 5월 31일, 레이첼과 포터의 결혼식은 보통의 결혼식 보다 더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저는 요크에서 방출된다고 발표가 있던 날, 그 날 결혼했습니다. 정말 좋았어요."라고 그가 농담을 했다. "결혼 후 아내와 처음 춤을 추는데 '그런데, 나 실업자야!'라고 했죠."

"만약 계약이 끝난 상황에서 당신이 리그2에 속한 선수이고, 포지션이 레프트백이고, 사람들이 돈을 투자해야하는 마지막 위치에 있다면 당신은 기다릴겁니다. 가장 늦게 일어나는 일들 중 하나죠."

포터는 보스턴 유나이티드에서 8개월 동안 "도전"을 치렀다. 또한 풋볼 리그 최하위에 속한 곳, 그가 여전히 살고 있던 요크에서 2시간 30분이나 통근 시간이 걸렸다. 그는 다음달 2월에 호튼의 매클즈필드에 합류하기 전, 2003년 겨울에 한 달동안 컨퍼런스에 속한 슈르즈베리 타운으로 임대를 가게 되어 비리그로까지 떨어지게 되었다. 

"마지막을 향해 가는 것 같다고 느꼈습니다. 열정, 즐거움은 원래 이런게 아니였습니다."

"저는 매클즈필드에서 방출되었습니다. 아마도 다른 구단과 계약할 수도 있었을 것이고 다른 선택지도 있었을겁니다. 제가 더 낮은 리그로 가는 방법말이죠. 하지만 저는 항상 경기를 기다리는게 저를 내모는것 같다고 느꼈습니다."

"그래서 저는 적극적인 조치를 취하기로 결심했습니다. 남은 인생동안 무엇을 할 것인가 계획하는 것 말이죠. 저는 충분히 프로페셔널했다고 생각하지 않았고, 최선을 다하지 못했기 때문에 감독을 경질시키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말합니다. '할수 있는 한 오랫동안 뛰고, 경기장에 머물러라.' 이게 저에게 올바른 일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힘든 순간이었죠."

포터는 코칭 과정을 시작했고 방송통신대학을 통해 사회과학 학위를 마쳤다. 축구와 교육의 결합은 2005년 경력에 있어서 미래 과정을 위한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고 입증되었다. 마이클 보건이 이끄는 잉글랜드 대표팀이 호주와의 애쉬 시리즈에서 2대 1로 승리하고 영웅적인 주인공 앤드류 플린토프가 주연이 된 동안에, 포터는 헐 대학의 축구 개발 감독으로서 1년에 17,000 파운드를 받았다. 이것은 임금을 대폭 깎은 것이었다. 

"선수시절 연봉은 지금 수치상으로 따졌을 때, 그리 높지 않지만 아마 하위리그에서 연봉을 3만 파운드정도 받았으니 대폭 떨어진 것은 맞습니다."

"저는 항상 면접을 얻기위한 과정을 기억합니다. 대학원 자리였습니다. 저는 축구에 대한 저의 이해력을 증명해야만 했습니다. 감사하게도, 저는 그 일을 해냈고 자격과 코칭 연습에 능동적으로 임했습니다."

"제 적기에 찾아왔습니다. 저는 선수생활을 그만 두었습니다. 저는 이 결정에 대해 괜찮았습니다. 그게 바로 애쉬2005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계속 재미를 느꼈고, 그러고 나서 약간 근질거리는 욕망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축구선수들이 어떻게 생각하고, 어떤 상황에 처하든지 상관없이 선수생활을 끝내게되면 일반적으로 문제가 됩니다. 정체성에 있어서 거대한 부분을 차지하고, 일부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됩니다. 그리고 이것을 받아들여야하죠."

"감사하게도, 저는 직업을 얻었습니다. 적어도 제가 축구계에서 계속 일할 수 있게 해주었고, 제가 축구선수로서 가졌던 경험들을 활용하기 위해서 노력했습니다."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했을 때 배운 것이 핵심이었다.

노던 카운티즈 이스트 리그는 잉글랜드 축구의 정점을 향해 올라가고 있는 포터에게 있어서 예상 밖의 베이스캠프였다.

그는 리즈 메트로폴리탄 대학교에서 리더쉽과 개인 및 전문 개발 석사 학위를 공부하면서 팀을 맡았다.

"따지자면 9부리그정도 될겁니다. 관중은 소수의 사람들만 있었습니다. 아마 100명, 운이 좋으면 200명정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경쟁적인 팀이었습니다. 요크셔에 있는 남자 팀들은 학생들을 이기기를 원했습니다. 정말 좋은 시절이었고 훌륭한 청년들이었습니다."

"제가 했었듯이 실수할 수 있는 환경이었지만, 저에게는 꽤 안전한 학습 환경이었고 찬란한 시간이었습니다."

헐 대학교에서 이전 역할을 맡는 동안, 포터는 중국에서 열린 2007년 여자 월드컵 결승에서 가나 기술 감독을 맡게 되어 다양한 배경을 갖게 되었다.

"우리는 대학을 통해서 가나 FA와 함께 몇 가지 일을 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나오게 된겁니다. 다른 날 저는 한 인용문을 읽었습니다:'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했을 때 배운 것이 핵심이다.'

"다른 문화, 다른 사고 방식을 가진 선수들과 함께 월드컵을 참가하는 위치에 있습니다. 이것은 긍정적인 경험이었고, 배움의 경험이었습니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 집에서 6주 정도 떨어져 있는 것은 꽤 힘들었습니다. 우리는 결국 남아프리카 공화국으로 갔고, 그 후 월드컵때문에 중국으로 갔습니다. (가나는 조별리그 3경기에서 모두 졌다.) 이 짧은 시간 동안에 경험을 쌓게 되었습니다."

포터는 또한 그의 학업적 욕구와 축구의 갈증을 합쳐져 30대 초반에 영국 대학의 수석 코치로 있게 되었다. 

"저는 그 대학 부문에서 5년을 보냈습니다. 그 분야는 배우기에 매우 좋았고, 활동하기도 좋았습니다. 여전히 팀을 준비하고, 선수를 선발하는 일을 겪으면서 동시에 프로 경기를 뛸 때 보다 더 많은 실수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비록 학구적이고, 매우 총명하고, 깊이 생각하는 사람이지만, 포터는 또한 재미있고 좋은 친구가 될 수 있다.

버밍엄과 스토크에서 함께 팀 동료로 지낸 후 웨스트 브롬에서 세번째 경기를 치른 페시솔리도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는 조용했습니다. 시끄러운 선수는 아니었지만 재치가 날카로웠습니다. 우리 시절에는 모든 사람들이 농담을 던지곤 했고 그는 농담의 대상이 될 수 있었지만 그는 항상 좋게 응수했습니다. 매우 건조한 유머감각이었습니다."

칼리슬 유나이티드와 해밀턴 아카데미칼을 포함하여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에서 많은 클럽에서 스트라이커로 뛰었던 브라이언 웨이크는 스웨덴의 외스테르순드에서 포터를 위해서 뛰었고 나중에 그의 코칭스태프 일원이 되었다. 

"우리가 승리했다면, 스태프들은 경기 후에 와인 한 잔을 마실겁니다."라고 웨이크가 말했다. "그러면 그레이엄이 자기 얘기를 하기 시작합니다. 정말 웃기고 재밌는 농담들이죠. 하지만, 훈련 시간이 되면, 진지해집니다. 그는 높은 수준을 요구하면서 선수들에게서 최고의 것을 표출하길 원합니다."

나는 축구를 속물로 여기지 않는다.

펩 과르디올라 감독은 포터가 맡은 팀들을 축구하는 방식에 가장 큰 영향을 끼쳤다. 시스템 유연성, 후방 빌드업, 점유율 지배, 과부하가 걸릴 정도로 창조적 시도를 하는 것, 이동성 있는 포워드 등 모두 포터의 철학의 기본 요소들이다. 

"이것은 끊임없는 여정입니다."라고 그가 말했다. "공에 대한 통제력을 가지고 있는 팀들은 제가 상대하는걸 좋아하지 않습니다."

"제가 젊은 코치시절에 바르셀로나의 과르디올라 팀을 목격하면서 그가 어떻게 이런것을 터득했는지 보려고 애썼습니다. 그의 길은 그의 사고력으로 인하여 축구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살펴보면 꽤나 영향력이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현재 맨시티의 감독인 과르디올라는 세계적인 선수들까지 향상시켜 그의 능력이 찬사를 받고 있다. 포터를 아는 사람들은 그의 책임감으로 그의 기술이 발전했다고 말한다. 

웨이크가 말했다. "그는 사람들에게 말하지 않고도 훈련 과정을 통해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가르칠 수 있습니다. 그는 선수가 어디로 이동을 해야하고 어디로 패스를 해줘야 하는지 등의 훈련을 설정해놓습니다."

"그는 선수들이 말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직접적으로 지시를 하지는 않지만, 선수들에게 선택권을 제시합니다. 그러면 올바른 결정을 내리는 것은 선수에게 달려있습니다. 그는 훈련 방법을 통해서 선수들의 의사 결정을 대대적으로 개선합니다."

포터는 결과나 팬들, 언론의 압박에 개의치 않고 그의 원칙을 고수할 것이다. 웨이크가 말했다. "그는 축구를 어떻게 해야하는지에 대한 이념을 가지고 있어서 이런 요소들에 의해 흔들리지 않습니다."

"제가 그를 위해서 뛰던 초기 몇 년 동안, 그는 백5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현지 언론들은 '백5는 안된다고, 효과가 없다고'라고 말했습니다. 지역지 기자들, 신문, 팬 등 상당히 비판적이었습니다. 그는 신경쓰지 않았습니다. 그가 하고 싶은 것을 모두 실행했고, 모든 사람들이 이해하도록 했습니다."

"당시 대부분의 스웨덴 축구 팀이 4-4-2로 경기를 했기 때문에 그가 스웨덴 축구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레이엄이 이곳을 마칠 무렵에는 모든 사람들이 다른 시스템을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포터가 크리스 휴턴의 뒤를 이은 후 브라이튼의 접근 방식은 12개월 만에 극적으로 바뀌었다. 휴턴 아래에서 프리미어리그 클럽 첫 두시즌 동안 강조한 것은 점유율 기반의 유동성 보다는 수비 회복력과 시스템 일관성이었다.

포터가 말했다. "저는 항상 이것을 강조합니다. 옳고 그름은 없으며 더 나은 어떠한 방법도 없습니다. 저는 축구계의 속물이 아닙니다. 그냥 내려앉아서 방어만 하고 있는게 아닙니다. 우리 모두는 우리의 선택지를 가지고 있고, 우리의 선택이 제대로 작동하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이게 바로 감독이란 직업의 본질입니다. 정말이죠."

"저는 이런 경기를 뛰었었습니다. 저는 통로에서 차라는 요청을 받았었죠. 가능한 한 우리의 골에서 멀리 떨어진 곳 말이죠. 이게 골킥으로 빠져도 상관 없었습니다. 제가 이런 식으로 경기를 한게 즐거웠을까요? 아니요, 정말 그러지 않았습니다. 그 의도가 경기에서 이기려고 한 것이었고 당시 그 감독이 이렇게 생각했다는 사실은 존중할 수 있습니다."

"저는 제가 그런 경기를 하고 싶지 않았다고 생각할 권리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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